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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주제 융합, '나'를 알아주는 '남'이 알아줄 수 없는 이유
작성자 강장묵 조회수 6733
작성일 2013.10.04

 

융합, '나'를 알아주는 '남'이 알아줄 수 없는 이유

강장묵

고려대학교 사범대 (정보창의교육연구소)

 

 

‘남’이 알아주지 않는 치명적 결핍

 

논어 학이(學而)편에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참으로 군자가 아닌가?’란 뜻이다.

그러나 전문가 시대에 ‘남이 알아주지 않음’은 치명적 결핍이다. 딱 굶어죽기 쉬운 위태로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군자도 입에 풀칠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남이 알아줄’ 전공과 길을 강요받아 왔던가?

남이 알아줄 일, 남의 시선을 끌어당겨야 하는 몸짓, 남들이 업신여기지 않는 직업만을 선망하는 사회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군자답지 못하다. 참으로 창조적이지 못하다. 참으로 피로하다.

그러나 전문화된 사회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어야만 하는 한 가지 일에 몸과 인생을 쏟아야 한다.’는 주문을 듣고 자라게 된다. 아니, 그래야만 생존한다는 정글의 법칙이 지속적으로 주입된다.

그러자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이 알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엄습한다. 타자와 나 사이의 불편한 시선은 긴장을 유발한다. 늘 긴장한 사람은 근육통을 앓기 마련이다. 근육통을 앓는 사람은 작업 속도가 느려진다. 늘 조급한 사회는 통제과 규율을 강조한다. 근육통을 앓는 사람들은 점점 더 경직된다. 타자와 나 사이의 불편한 시선은 창의력이 설 자리를 규율과 통제로 전환시킨다.

분업화된 사회에 개인은 긴장 속에서는 반복된 작업을 실수없이, 아주 재미없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 작업반들이 즐비한 사회는 통조림은 생산해도 아이폰은 세계 최초로 만들 수는 없다.

규율과 강제 속에서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창조적 파괴란, 반역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줄 수 없는 완장사회

 

그렇다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가 ‘나’의 실력이 전문가와 비슷하거나 탁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십중팔구 전문가의 완장을 차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완장은 ‘사’자로 공인받은 자격증에서부터 박사학위, 유학 심지어는 특목고 출신까지 섬세하게 사회에 깃들여 있다. 사회에 스며든 완장 정신은 깨닫지 못해도 느낄 수 있다.

느껴지는 무게감은 사회 구성원들을 ‘완장’사회로 이끈다. 유독 ‘공부의 질’은 떨어지고 학벌과 학위의 양만 늘어난다. 완장 사회는 독창성과 실력보다 완장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데 급급하다.

그러다 치더라도, ‘나’를 알아주는 충분조건은 탁월하게 뛰어난 순간이다. 그러다 할지라도 ‘나’를 알아주는 필요조건은 아무리 탁월하게 뛰어나도 전문가 완장이 없으면 의심받는다는 명제이다.

‘나’를 알아줄 수 없는 것이다. 평범한 개인이 전문가만이 해결해야 할 영역에 침범하면 그 죄는 실로 크다.

감히 평범한 개인이 신문을 읽고 잡지를 구독하고 인터넷을 뒤져, 짜깁기한 지식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하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힌다)한다는 누명을 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네르바 사건(미네르바 사건은 2008년 하반기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2008년 하반기 리먼 브라더스의 부실과 환율폭등 및 금융위기의 심각성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경제추이를 예견하는 글로 주목을 받던 인터넷 논객 박대성씨가 허위사실유포혐의로 체포 및 구속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된 사건이다. 이후 박대성씨는 허위사실유포죄에 해당 하는 전기통신위반법 47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고, 위헌판결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참조)이 있었고 수많은 유명인이 학력위조를 고백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분업화 사회의 효율성은 전문가의 투철한 소명의식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개인이 참여할 수 없는 전문가만의 밥상을 차려주는 사회 구조로 완성된다.

그러나 신선한 아이디어가 거절당하지 않거나, 독창적인 생각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 구성원에게 전달될 수 있는 합리적인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거 같으면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포럼, 연구회, 위원회 등에 평범한 시민에게 참여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나이어린 고졸자가 아버지 벌의 꼰대같은 전문가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조정하고 상생시킬 수 있는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과 이견에 대한 유입이 환영받는 일이어야 한다. 다른 의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문제아, 반항아, 불만 세력이 아니라, 창조적 파괴를 돕는 조력자, 연결자, 생산자로 전환될 수 있을까?

 

 

즐거우면 이기는 거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사회의 특권층인가?

전문가란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네이버 백과사전 참조)을 뜻한다. 한마디로 초보자, 신출내기, 풋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오랜 경험 그리고 노하우를 내면화한 장본인이다.

이런 전문가의 직업정신, 자기관리를 일화로 삼아 청소년들은 성장한다. 전문가는 한 가지 기술과 지식에 숙련되기까지 고된 노력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방점을 찍는 마지막 일격은 다른 분야의 색다른 정신, 과정, 결과물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최고의 전문가 또는 권위자는 융합의 결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자이다. 새로움 속에는 과거의 묶은 질서에 대한 창조적 파괴가 숨어있다.

따라서 한 가지를 죽도록 파다보면 밥은 굶지 않는다. 자칫 두루두루 섭력하거나 여러 이치를 꿰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은 ‘남’이 알아줄 수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영역이다. 바로 융합의 세계이다.

논어(論語)에는 ‘발분망식 낙이망우(發憤忘食 樂而忘憂)’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먹는 것조차 망각하고 즐거움으로 인해 근심조차 잊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삶의 목적과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행복에 있다는데 이견이 없다. 좋아서 하다보면 근심조차 없다. 좋아서 하다보면 형식과 규율보다 필요한 것은 가져다가 붙이게 된다. 그 성과물에 대한 가치를 재화와 인정에만 두지는 않는다. 창조적 과정 그 자체에 두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 없던 완벽한 새로움이란 없다. 그건 신만의 영역이다. 어쩌면 모든 창조적 작업들은 모방의 연속이고 융합의 결과이다.

 

 

창조적 협업을 통한 융합

 

‘창조경제’가 정권 초창기에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바로, 창조적 협업을 통한 융합 사회의 비전이 필요하다.

융합도 창조적 시야에서 시도해야 한다. 창조적 시야에서의 융합이란 행위자, 역할, 성과 분배 등에 있어서 기존 시스템과 달라져야 한다. 기존의 틀이란 분업화된 사회 시스템에 부속품 같은 전문가를 양산하는 프레임이었다. 즉 더 많은 부속품을 효율적으로 규율하고 통제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기존의 틀 속에서는 통조림이 효율적으로 생산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산업간 사람간 사물간 융합이 시도되고 창달되어 신세계를 열어 가는데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융합을 시도하는 노력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융합은 전문가들의 기존 밥상을 지켜주고 그 영역을 다른 곳으로 확장하여 쟁탈하고 획득하는 땅 따먹기 방식이 대부분이다. 융합의 효율성을 강조하다보면 익숙했던 개발방식,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면서 개선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융합을 이해하게 된다.

미국의 MIT의 미디어랩은 컴퓨터공학자가 주도하는 연구소가 아니다. 오히려 뉴미디어를 연구하는데 인문학자와 종교학자에게 새로운 영역과 바탕을 넓힐 수 있도록 컴퓨터공학자가 자신의 밥상을 펼쳐놓은 형상이다. 기술로 무장한 컴퓨터공학자의 입장에서 미디어랩을 운영하는데 인문학자나 종교학자를 1-2명만 뽑아서 구색 맞추거나 한 두번 특강 초청해서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라는 감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고로는 괜찮은 통조림은 만들어도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을 개발할 수는 없다.

융합은 기존 틀을 깨는 도전에 있다. 말하는 그림, 환자의 상태를 스토리텔링해주는 면역체계,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로봇, 화성에서 인간이 살게 될 때 생기는 새로운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 인문학, 고전, 의료, 금융 등이 융합을 위해 자기 밥그릇을 비우고 만날 때 비로소 융합은 실현된다.

융합을 하고자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풍토야 말로 융합을 방해한다. 긴장을 늦추고 경직을 풀고 사회 구성원 간 경계를 무너트려야 창조적 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장묵 교수(고려대), 공학박사

                                                                         (이메일 : kangjm@korea.ac.kr    mooknc@gmail.com)

 

 

저자는 차이가 차별로 구조화되는 사회를 반대한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염장질은 나의 버릇이다.

날마다, 창조적 조응을 통한 매혹을 그린다.

지루한 사람 곁에는 하품을, 어딘가 꼬여 부정적인 이에게는 안쓰러움을, 직급만 믿는 이에게는 거품 물방울을 뿌리며 산다.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고, 물질보단 열정을 쫓는다. 느낌표가 그리울 땐 여행을 간다. 아이디어를 발견하면 글을 쓴다. 틈틈이 특강, 심사, 포럼을 하며 얇은 지식의 표상들에게 비수를 꽂는다. 사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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