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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주제 와글(buzzing)거림에서 속닥거림으로
작성자 강장묵 조회수 11339
작성일 2014.02.03

 

와글(buzzing)거림에서 속닥거림으로

강장묵

고려대학교 컴퓨터교육학과 (정보창의교육연구소)

 

 

와글거림(buzzing)이 갖는 공허함

 

축적된 경험은 소통(Good Understanding)에 영향을 끼친다. 왕왕 고집스런 사람을 본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이테만큼 견고해진 이마에 ‘주름만 잡혔다 풀렸다’ 할 뿐이다.

꼰대라고 몰아세우지 않더라도 난감하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체험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 유의 분들은 ‘종 종’ 이 아닌 ‘왕 왕’ 등장한다. 이들은 소통하는 흉내만 낼 뿐, 공감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근자에 사건들로 유추해보자면, 박근혜 대통령도 이명박 전대통령도 ‘국민을 섬기고 소통을 잘 하겠다’고 소신만 밝혔지, ‘그~닥’ 그래보이진 않는다.

으레 지체 높으신 분들은 정책의 향배를 논할 때, 반대 의견이란 것을 경청의 대상이라기보다 통과 의례로 여긴다.

인터넷 대통령이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모양만 다를 뿐, 엘리트 정치인들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소통이 막혀 있었다. 노대통령 재임시절에 만들어진 인터넷 악법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 인터넷으로 당선되었다지만 인터넷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엘리트 정치인들에 둘러싸인 노정권의 한계였다.

정권이 좌냐 우냐가 아니라, 대인배(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소인배(시민)들에게 귀 기울일 방책도 이유도 없는 것이 문제이다. 진정성 없는 흉내 내기는 금방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이고 시민은 냉소적이 된다. 이는 대통령부터 엘리트 정치인 그리고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엇갈릴 수밖에 없는 소통의 현주소이다.

 

 

(그림 1) 소통의 이해

출처: http://actstraining.com/wp-content/uploads/2011/04/understandingcartoon1.jpg(검색일:2014.1.30.)

 

마치 페북의 ‘좋아요’ 버튼이 늘어갈수록 공허함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엘리트 정치인이 시민과 소통하지 못하고, 전문가가 비전문가와 말을 섞지 못하고,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친분을 쌓지 못하는 것(정들면 비정규직은 잘려 나가니까?)은 인터넷의 물리적 속도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문제이다.

이 모든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인의 인격에 맡긴다. 복불복[福不福] 이다.

사회는 면면히 유지되지만 그 이면에는 소수 엘리트가 다수 시민의 소통을 단절하거나 왜곡하거나 ‘공감한다고 말하고서는 시치미를 뚝 떼는 방식’이 우세하다. 이런 사회는 엘리트가 직접 서민과 싸우기보다 서민이 서민을 깔보고, 서민이 서민과 싸우는 양상을 통해 사회의 갈등 양상을 증폭시킨다.

스마트 기기가 등장하여도 엇갈린 소통은 ‘좋아요’ 한방에 치료되지 않는다. 다만 공허한 ‘좋아요’라는 울림만 귀전을 때릴 뿐이다.

 

속닥속닥의 소리만 높아가고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기억하는가? 어차피 소통이란 긴밀한 관계에서의 끈기 있는 메아리라는 믿음이 유효하지 않은가? 가족말고 절친말고 같은 처지의 동기말고 누구에게 마음을 열수 있단 말인가?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인 페이스북이 회원수를 늘려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이용자들의 피로감도 높아간다. 이 피로감이란 먼거리 친구인데 찰싹 달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에서부터, 드러내고 싶은 정보가 순식간에 감추고 싶은 감상으로 느껴지는 순간까지 다양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청소년들이 부모님과의 페이스북 친구 맺기를 거절하거나 페이스북을 박차고 나가는 경우(폐쇄형 SNS의 일종인 스냅챗으로 이동)도 늘고 있다.

점점 올드해지고 꼰대스러운 이용자들로 가득해지는 페이스북에 대한 이용자들의 사용 태도도 제각각이다.

첫째, 페이스북을 철저하게 자기 홍보 또는 지식 공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젊잖게 전문지식을 읊조리거나 객관적 사실에 개인 의견을 살짝 비치는 정도로 이용한다. 왠지 얄밉지만, 안정감을 준다.

둘째, 페이스북을 사견과 감성의 통로로 삼는 경우이다. 이런 생각부터 저런 느낌까지 살가운 글로 공감대를 얻는다. 따스하지만 가끔은 치기어린 감성이 위태로워 보인다.

셋째, 페이스북을 몰래카메라쯤으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자신의 글은 온데간데없고 남의 글만 퍼날라오거나 남의 글만 조용히 눈팅하는 경우이다. 속내를 알길 없고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페이스북에 대한 이용자의 태도가 천차만별이라 할지라도, 개방형 네트워크인 페이스북은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강요한다. 친구의 친구를 추천하고, 친구의 글을 보여주고, 순간적이지만 ‘좋아요’에 열광하게 한다. ‘좋아요’가 늘어나면 중요 인물이 된 듯 한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말조심을 해야 하는 지체 높은 분들이나 눈 휘둥그레 바쁜 대부분의 고위직은 페이스북 사용에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대법관이 판사가 ‘오늘의 판결’에 대한 소회를 밝히거나 대통령이 감상을 적거나 의사가 수술실의 환자 모습을 표현하거나 고위관료가 정책에 대한 소고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페이스북은 개방형 네트워크에서의 관계망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타인의 감시가 늘 존재하고 언제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공유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즉, 범인은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사회의 1% 내외의 주요 결정자들은 휴대폰 전화 등 비밀이 보장되는 통신을 이용한다. 굳이 속내를 밝힐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방형 네트워크에 대한 이용 자제 또는 공개된 망에서의 처신을 강조하는 훈령이 내부적으로 공유되기도 한다.

 

‘속닥 속닥’에서 유유상종으로

 

인터넷이 태동하면서 열린 사회가 가능하리라 기대했었다. 유토피아적 발상이지만, 인터넷은 평생 마주할 것 같지 않던 ‘스타와 팬’, ‘정치인과 시민’, ‘기업가와 소비자’를 이어줄 것으로 여겨졌었다. 재계 회장의 트위터 계정과 모 의원님의 페이스북 아이디가 회자되었고 훈훈한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관계망 서비스에서는 프라이버시의 침해, 관계의 피로, ‘왁자지껄’한 소통 후에 허무함을 토로하는 감회가 늘어난다.

그래서 일까? 열린 공간의 관계망 서비스가 급격하게 닫힌 공간의 관계망으로 옮겨지고 있다.

다음은 폐쇄형 SNS인 ‘쏠그룹’을 출시하였다. 이미 네이버 밴드의 ‘속닥속닥’임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왁자지걸보다 큰 소리를 낸다.

모르는 사람은 빼고 친한 사람, 얼굴 한번쯤은 직접 본 사람과의 끈끈한 만남을 전제로 시작된 폐쇄형 커뮤니티는 유유상종이 주는 편안함을 기반으로 한다.

 

(그림2) 우리끼리, 속닥속닥 밴드

  출처: http://band.naver.com/ (검색일: 2014.1.30.)

 

필자 역시 동창회 모임, 가족모임 등 전통적 방식의 학연, 혈연, 지연의 모임은 ‘밴드’를 통해 소통한다. 최근 모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밴드를 통해 파업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아 밴드에 대한 정보 전체를 압수수색당하기도 했었다.

폐쇄형 SNS에서 우리는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더러 민감하고 예민한 주제도 은밀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은밀하고 친밀한 사적 관계와 공유된 공적 관계가 횡과 종으로 만나 구성된다. 당연히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같은 개방형 네트워크 서비스와 밴드와 쏠그룹과 같은 폐쇄형 네트워크 서비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열린 네트워크의 소통에 피로감을 표현하는 이면에는 우리 사회가 상대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타인에 대한 사적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웃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이웃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타인에 대한 엿보기만 존재한다면 ‘좋아요’는 가식적인 클릭일 따름이다. 타인과 비교하기 위한 글쓰기가 넘쳐난다면 이 또한 고가 핸드백을 구매하는 충동질과 다를 바 없다.

페이스북 등 열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하나의 의견을 동영상(유튜브), 문자(트위터), 위치(포스퀘어) 등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즉 하나의 의견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도와 공감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폐쇄적 유대와 소통에 익숙하여 왔다. 여전히 소위 특권 계층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인재를 찾고 그들만의 공고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휴대폰, 카카오톡, 싸이월드 등 1:1 소통 또는 특정 조건을 갖춘 회원 사이의 커뮤니티가 활발하다.

이젠 폐쇄망에서의 SNS와 개방망에서의 SNS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해야한다. 특히 정치, 사회, 종교 등 민감한 분야에 엘리트와 보통사람이, 부자와 가난한 자가, 경상도와 전라도가, 투명하게 소통하면서도 사회적 혼란이 없는 매커니즘이 제시되어야 할 때이다.

‘예민한 인사문제, 민감한 예산문제, 첨예한 정책문제는 비밀로 은밀하게 이루어질 때 잡음도 적고 효율적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어떤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잡스러운 주장을 깡그리 무시해야하는 것은 ‘열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억측 때문이다.

초분산의 고도화된 사회라면 일사분란한 명령체제와 상명하복의 규율이 필요한 분야는 점점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유기적 네트워크에서 유기적 관계망과 의사소통체계가 유토피아적 구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도 권력에 줄을 서기에 바쁜 학자와 엘리트 집단의 시선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강장묵 교수(고려대), 공학박사/정치학박사

                                                                (이메일 : kangjm@korea.ac.kr  mooknc@gmail.com)

                                                                 URL: http://www.slideshare.net/mooknc

 

 

저자는 차이가 차별로 구조화되는 사회를 반대한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염장질은 나의 버릇이다.

날마다, 창조적 조응을 통한 매혹을 그린다.

지루한 사람 곁에는 하품을, 어딘가 꼬여 부정적인 이에게는 안쓰러움을, 직급만 믿는 이에게는 거품 물방울을, 학위와 학벌을 훈장처럼 여기는 이에게는 낙엽을 건네며 산다.

하고 싶은 일만 솎아, 미래를 심는다. 느낌표가 그리울 땐 여행을 간다. 아이디어를 발견하면 글을 쓴다. 돈이 궁할 땐 특허를 내고 사업을 한다. 틈틈이 특강, 심사, 포럼을 하며 얇은 지식의 표상들에게 비수를 꽂는다. 사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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